목회자코너
제목
성령시리즈(5) 성령은 인격이시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간에, 자신을 얼마나 많이 훈련시켰는지 간에,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게 하시는 데 얼마나 많이 노력을 했는지 간에, 성령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의 삶은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가르침이나 의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주어진 것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삶 속에서 경험하기 위함입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님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성령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스타워즈’에 나오는 하나의 신비하고 비인격적인 “큰 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령을 축복과 능력의 근원으로만 여겨, 그 힘에 연결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얻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양심과 비슷하게 선한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계란 본래에 공공관계나 권세를 얻는 수단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근원과 연결되어 능력을 조종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사랑의 관계는 인격체하고만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인격이시다’는 말은 육체를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졌다고 다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때 영이 육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도 우리는 인격체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인격체라면,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우리가 볼 수 없는 인격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두 인격의 관계는 상호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상호 의사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경험해야 합니다.
저도 아내와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우린 서로 말하며, 마음을 나누고, 손도 잡고, 포옹하며 아내가 옆에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로를 기쁘게 할 일을 합니다. 서로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런 상호작용이 관계성입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이순신 장군과 관계를 맺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그가 어떠했는지 이순신의 일생을 공부할 것입니다. 그의 글들과 그를 아는 사람들의 글을 읽을 것입니다. 그가 이룬 훌륭한 업적과 사료 덕분에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무덤에 찾아가 그 곁에 서서 그와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과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관계에는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이순신이 나를 알아보고 말을 한다거나, 약속을 한다거나, 내 등을 두드려 줄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을 경험할 능력이 없으므로 나는 이순신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에 관해서 알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령님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성령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스타워즈’에 나오는 하나의 신비하고 비인격적인 “큰 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령을 축복과 능력의 근원으로만 여겨, 그 힘에 연결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얻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양심과 비슷하게 선한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계란 본래에 공공관계나 권세를 얻는 수단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근원과 연결되어 능력을 조종하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사랑의 관계는 인격체하고만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인격이시다’는 말은 육체를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체를 가졌다고 다 인격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때 영이 육을 떠나게 되는데 그때도 우리는 인격체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인격체라면,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우리가 볼 수 없는 인격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두 인격의 관계는 상호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상호 의사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경험해야 합니다.
저도 아내와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우린 서로 말하며, 마음을 나누고, 손도 잡고, 포옹하며 아내가 옆에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로를 기쁘게 할 일을 합니다. 서로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런 상호작용이 관계성입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이순신 장군과 관계를 맺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그가 어떠했는지 이순신의 일생을 공부할 것입니다. 그의 글들과 그를 아는 사람들의 글을 읽을 것입니다. 그가 이룬 훌륭한 업적과 사료 덕분에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무덤에 찾아가 그 곁에 서서 그와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과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관계에는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이순신이 나를 알아보고 말을 한다거나, 약속을 한다거나, 내 등을 두드려 줄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을 경험할 능력이 없으므로 나는 이순신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에 관해서 알 수는 있으나 그 사람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