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코너
제목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일본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이자, 250년간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의 피를 뿌린 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나가사키의 노래》을 읽고,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를 보면서 그 지역이 지닌 비극과 신앙의 무게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여정은 후쿠오카에서 시작하여 가라쓰, 히라도, 소토메, 시마바라, 운젠, 나가사키, 오무라로 이어졌습니다. 여정마다 성당과 순교터, 기념비와 무덤, 동상과 구제원 등을 볼 수 있었고, 그 현장은 믿음을 지키다 쓰러져간 수많은 이들의 증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잘 정돈된 거리와 교통체계, 사람들의 친절함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호텔에서 하는 온천욕은 덤으로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일본에 카톨릭이 전래된 것은 16세기 중엽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사 때입니다.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지만 세력이 커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절정이 1597년의 26성인 순교입니다. 스페인 상선 ‘산 펠리페호’ 표류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세력이 일본을 지배하려 한다는 의심이 커지자, 히데요시는 선교사와 신자 26명을 체포해 800km를 걸어 나가사키까지 끌고가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했습니다.
해발 700미터의 화산지대인 운젠이라는 곳은 뜨거운 유황 가스와 끓어오르는 온천으로 옛날부터 ‘지옥’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배교를 강요하기 위해 신자들을 유황탕 속에 집어넣거나 십자가에 달아놓고 온 몸에 200도가 넘는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하고 그래서 수많은 이름 없는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장소였습니다.
나가사키는 또 하나의 비극을 품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입니다. 원래 목표는 고쿠라였으나 기상 문제로 나가사키가 선택되었고. 단번에 7만 명이 목숨을 잃고, 도시의 3분의 1 이상이 파괴되었으며, 생존자들은 평생 방사능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당시 약 2만 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어 미쓰비시 조선소와 무기 제작 공장 등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1만 명 이상이 피폭되고 그 가운데 2천에서 8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신앙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 인물이 나가이 다카시 박사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방사선 의학자이자 카톨릭 신자로, 원폭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도 중병을 얻었지만 끝까지 용서와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의 집은 성경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이름을 딴 ‘여기당(如己堂)’으로 불리며 지금도 평화와 희망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순례의 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생각은 “목숨이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있을 때, 과연 저들처럼 나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과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함을 생각합니다.
이번 여정은 후쿠오카에서 시작하여 가라쓰, 히라도, 소토메, 시마바라, 운젠, 나가사키, 오무라로 이어졌습니다. 여정마다 성당과 순교터, 기념비와 무덤, 동상과 구제원 등을 볼 수 있었고, 그 현장은 믿음을 지키다 쓰러져간 수많은 이들의 증언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잘 정돈된 거리와 교통체계, 사람들의 친절함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호텔에서 하는 온천욕은 덤으로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일본에 카톨릭이 전래된 것은 16세기 중엽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교사 때입니다.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지만 세력이 커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절정이 1597년의 26성인 순교입니다. 스페인 상선 ‘산 펠리페호’ 표류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세력이 일본을 지배하려 한다는 의심이 커지자, 히데요시는 선교사와 신자 26명을 체포해 800km를 걸어 나가사키까지 끌고가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했습니다.
해발 700미터의 화산지대인 운젠이라는 곳은 뜨거운 유황 가스와 끓어오르는 온천으로 옛날부터 ‘지옥’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배교를 강요하기 위해 신자들을 유황탕 속에 집어넣거나 십자가에 달아놓고 온 몸에 200도가 넘는 뜨거운 물을 붓기도 하고 그래서 수많은 이름 없는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장소였습니다.
나가사키는 또 하나의 비극을 품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입니다. 원래 목표는 고쿠라였으나 기상 문제로 나가사키가 선택되었고. 단번에 7만 명이 목숨을 잃고, 도시의 3분의 1 이상이 파괴되었으며, 생존자들은 평생 방사능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당시 약 2만 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어 미쓰비시 조선소와 무기 제작 공장 등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1만 명 이상이 피폭되고 그 가운데 2천에서 8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살아남아 평생을 신앙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 인물이 나가이 다카시 박사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방사선 의학자이자 카톨릭 신자로, 원폭으로 아내를 잃고 자신도 중병을 얻었지만 끝까지 용서와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의 집은 성경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이름을 딴 ‘여기당(如己堂)’으로 불리며 지금도 평화와 희망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순례의 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생각은 “목숨이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있을 때, 과연 저들처럼 나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과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과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함을 생각합니다.